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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시간

책: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azooma 2022. 2. 4. 23:10

-백영옥 지음
-arte 출판
-에세이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94803

개인적으로 읽을 책을 고르는 기준의 8할은 저자의 서문(프롤로그)이다. 때문에 서문이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으면 들었던 책을 내려놓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책이라도 현재 읽고자 하는 책의 서문이 나의 코드와 다른 느낌이라면 읽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백영옥 님의 다른 책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었다. 그 책의 신선함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는데 -'빨강 머리 앤'이 어떤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으므로-오랜만에 도서관에서 그녀의 다른 책을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문을 읽었고 서문에서 느껴지는 그녀 특유의 잔잔하고 부드러우며 재치 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읽게 되었다.

-내가 그은 서문의 밑줄-
"제가 그어 온 책 속 밑줄 중 단 하나라도 당신의 상처에 가 닿아 연고처럼 스민다면 그것으로 저는 정말 기쁠 거예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문장이란 말에 매료되어 책장을 넘길 때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책은 그녀가 읽었던 책들 속에서 그녀가 위로받았을 법한 문장들을 소개하며 그녀의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다. 대부분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었는데 다만 초반 사랑에 관한 내용은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나에게 사랑과 연애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가 된 때문일테다. 어릴 때는 드라마나 소설 속의 가슴 저미는 사랑 한 번 못 해 본 것이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인생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은 그런 사랑 없이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 아름다운 첫사랑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겠다. 하지만 누구나 누릴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나 누리기 힘든 평범한 일상을 오래도록 누린다는 것은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인생의 집-비록 그것이 소박한 단층집일지라도-을 가진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집을 짓기 위해 나와 내 가족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노력했겠는가? 결혼이란 살아보니 그렇더라. 분명 사랑과는 다른 무엇들을 필요로 한다. 평범한 남과 여가 만나 서로의 민낯을 보며 치열하게 다투기도 하고 조율도 하면서 어느 순간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서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것. 내가 경험한 20여 년의 결혼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에겐 이미 지나버린 시간들이라 그렇게 여겨졌지만, 지금 현재 사랑을 하고,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위로가 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먼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행위예술가의 존재이다. 사실 나는 행위예술이란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행위예술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무언가 기괴하거나 불필요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책에서 소개한 그녀의 퍼포먼스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영상을 찾아보며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는 동안 무척 행복했다. 그녀가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옛 연인을 만나는 장면보다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녀의 앞에 앉아 무언의 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치유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아름다웠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또 하나는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의 한 부분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산문집을 소장하고 있고, 당연히 읽었으며 나름 박준의 글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작가가 소개한 부분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나의 편지에 관한 부분만 짧게 따로 떼어 옮겨 놓았는데도 누나와 그 편지를 읽는 동생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상 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읽은 기억이 없다?! 결국 다시 찾아보았다. 이래서 좋은 책은 여러 번 되뇌어 읽고, 여러 사람과 공유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어느 해 국민일보에 실렸다는 78세 나모 할머니의 유서를 읽고는 끝내 통곡하고 말았다. 인생 적당히 살았고 장성한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나모 할머니의 유서는 나의 미래같았다. 과연 나는 나의 유서에 어떤 말들을 적어 넣을 것인가? 곁에 있던 딸아이가 "엄마, 왜 그래?"라고 물어도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세대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좀 더 나이가 들어 할머니 소리를 들을 때 읽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것 같다.
그 외에도 아직 읽지 못한 한강의 산문집-사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내게는 그로테스크한 충격-적어도 내게는-으로 다가 왔기에 그의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두려웠다. 수잔 데이비스의 '감정의 경직성'이란 말, 배우 나문희의 수상소감, 데이비드 즈와이그의 [인비저블], 그리고 내 삶의 '리추얼'을 생각하게 된 일 등 책을 통해 읽고 싶은 책이 생기고,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고, 퍼져 있던 생각을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정리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책은 읽는 사람마다 감동하고, 배우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책이 인간에게 오래도록 꼭 필요한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매일 읽고 매일 쓰는 작가 백영옥이 간직해온 문장들을 우리에게 건네다!추억 속 빨강머리 앤을 우리 곁으로 다시 불러내 희망과 위로의 말들로 많은 독자들과 공감을 나누었던 《빨강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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